다시는 거리에 서지 않겠다는 다짐.
97학번인 나에게 있어서, 96년 연대 항쟁(사태)... 96학번 이상의 선배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껄끄러운 빨갱이들이었다. 집안 자체가 민정당 국회의원 후원회 소속이었고,
물태우가 대통령이 되던 해에 우리집에는 비누와 수건이 쌓여있었으니까.
인천촌놈이 당시 재개발에 들어가던 청량리였는지 행당동에 갔다가 철거깡패를 보게 되었다.
사람이 아닌 웃통을 벗고 그림을 그려넣은 돼지새끼가
어머니뻘 되는 사람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고교시절에 개인의 어려움을 딛고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보였던 존경하는 박홍 개새끼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이 어느날 갑자기 사직서를 냈다는 그 소식에.
선생님이 불러주시던 "터"라는 노래가 무엇을 염원하는 노래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97년 한대.
너무도 뜨거웠던 그 여름. 이석씨 폭행치사사건, 전투경찰 압사사건... 등을 거치면서,
내 주변에 너무도 많은 이들이 사법처리를 받게 되었고,
그날 밤의 귀를 스쳐 지나가던 직격탄 악몽은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그렇게 뛰어다니고 무엇을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DJ정권이 들어서고,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거리에 서는 것은 내 개인시간을 희생해가며 계란으로 바위치기하는 바보같은 짓이다"
"다시는 거리에 서지 않겠다."
라는 치사한 변명을 뒤로 하고, 나는 침묵하는 "무언의 동조자"가 되었다.
노대통령 탄핵 발의때 여의도에서 종각까지 근 몇일을 밤샘을 한 뒤로 ... 나는 대중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런데, 내일은 나가야겠다.
돌돌이는 감기에 걸려 같이 갈수는 없을 것이고, 혼자라도 다녀와야 할 것같다.
청년 만화가가 아사를 해서 바뀌지는 않는 세상
세모녀가 먹고살기가 힘들어 자살을 택했는데도 바뀌지 않는 세상
우리의 아들,딸이자 조카이자 동생인 아이들이 그 차갑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왜, 어떻게 죽었는지,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왜 인양을 제대로 못하는지 아무도 답변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이제는 우리는 정의를 이야기해야할 때가 된 것 같다.
세상을 바꿀수는 없을지라도, 바꾸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