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문을 보고 있자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피곤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나라가 발전하기 위하여 깊이있는 토론과 키워나가야할 담론, 사회 깊은 곳에서 통찰을 통해서 나와야 하는 다양한 이슈와, 우리가 미쳐 살펴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마지막학기에 들었던 "현대사회"에 의 주제목은 "지속가능한 개발"이었다.
마지막 학기에 그저 편하게 이수학점 수강을 위해 들었던 사회대의 강의가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또렸하니, 나에게는 너무도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친해졌던 법대와 상대 학우들과 친해져서 함께 모여 소주를 한잔 하면서도, 이야기를 했던 것은 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수식어를 과연 지금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상대의 미친 "리버럴리스트"의 목소리가 나보다 커서 그랬는지, 우리는 저 개념이 불가능한 것.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졸업하여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한정된 재화와 용역"이 순환하는 과정에서 그 정량이 어느정도의 이동을 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자본이 모든 것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종내에는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본에 종속되어 사회가 움직이면서, 어느 순간에는 "한정된 재화와 용역"이 이동을 하여도 자본->노동자로의 흐름이 끊어지게 되면서, 사회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다니. 대견한 녀석들.
또 하나 생각하는 것은 "사회보편적 타당성" 이라는 문구였다. 군시절의 본부 중대에 있던 종교병이 늘 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하여간에 무슨 신앙이니, 무엇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사회보편적으로 타당하다."라는 개념으로 주변에 있던 우리를 힘들게 했다. 사회적... 이라는 부분을 잘라봐도, 그 담은 의미가 방대하고, 사회 보편적까지 확장해봐도,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보편적인 범위까지 넓힐 수 있는데, 거기에 타당이라는 단어까지 붙이니, 3단어 모두가 하나를 향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나마 생각이 통한다고 무리이어 다니던 근처 군번들 사이에서는 저 단어를 곧 "다수결"이라는 단어로 정리해버렸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스펙트럼이 정치, 경제적으로 너무도 범위가 넓은데, 사회에 보편성이 존재하냐는 서로의 질문에 내심 의견을 내기에는 바빳지만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은 "통계적" 개념과 사회의 절대 다수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기분나쁘게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단어는 바로 "중산층"이었다.
아무도 인정할 수 없고, 이제는 말도 안되는 포괄적인 의미가 되버린 "중산층" 이 중산층이라는 단어로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통계의 오류와 위정자들의 선동에 이끌려 살아왔는지 생각한다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5억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대출이 4억이 있는, 연소득 1억의 남자가 중산층인것인지 ?
30억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통장에 1억이 있고, 연소득이 3천만원의 남자가 중산층인 것인지?
혹은 둘중에 누가 더 부유한 것인지?
우리는 "사회보편적 타당성"이라는 단어를 제시한 자의 심중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내재된 무서움에 대한 자각없이, "중산층", 사회의 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 라는 결론을 내버렸다.
얼마전부터 조간신문을 보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박근혜정권의 여러가지 이슈들이 1면에 크게 나오면서부터였다. 그 옛날 부엉이 바위에서 세상을 등져야 했던 그분이 경고했던 내용중에, "정치로의 무관심"을 이끌어 내는 것인 그들의 목표였다면 성공적이라고 판단할 만했다.
내 주변의 나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무리들은 가카새끼 이후 모든 것이 피곤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는 가쉽거리 뉴스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침묵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던날 밤 술에 취해 분노하던 우리는 사라졌고, 무관심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기 시작했고, 결론이 뻔하게 날 그것에 대한 이야기에는 입을 닫았다.
비록, 여권의 자중지란으로 상대적으로 야당이 득을 보아, "여소야대"라는 균형을 맞추게 되었지만, 보란듯이 그들은 시민사회의 문제점을 각인시켜 물위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뒷발질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수백명이 돌아오지 못한 사건. 전투함과 사병을 인간지뢰따위에 잃고 와서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는 똥별들. 멀쩡한 강바닥을 뒤집어 놓아 녹조강이 된 우리의 강산.
그런데, 부쩍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요즘의 이름이 있다. 정씨와 최씨.
하도 이름을 많이 들어서, 이제는 더 이상 무관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곳곳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이제 모두가 침묵과 무관심으로는 이겨낼수가 없는가보다. 대략적인 뉴스와 몇가지를 검색해봤지만,
조선왕조 계보를 외우는 것보다 어려웠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자들이 등장하고, 중간에 이름은 바뀌는지 원.
-이하는 소설-
조선일보의 신문에 게재된 "오늘의 실용한자" 는 "하야"였다.
예전에 하던 블로그에서도 썻던 말인데... 가카새끼는 정말 훌륭한 대통령감이었다고 생각한다. 특정 지지계층의 노골적인 지지를 받음과 동시에, 계속적인 공구리를 통한 이슈선점! 추진력을 얻기 위한 교묘한 수구림과 함께 터지는 일발장타의 매끈한 시나리오까지 없는게 없었다.
나라도 가진게 좀 있었다면, 그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싶다. 땅을 매개체로 한 달콤한 속삭임와 그 섹시한 유혹. 이건 뭐 버리다시피 방관하던 천 주변 땅값을 띄어주고, 도심은 재개발로 띄어주고, 뭐 산업따위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땅덩이에 토지와 건물로 "한정된 재화와 용역"의 쉬프트를 하게 해주니, 과정에서 콩고물도 떨어지고... (대규모 토건사업, 국책사업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건설놀이는 확실한 내수창출을 가져온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일자리 수요는 곧바로 내수에 사용되니, 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이신가.
친히 강바닥을 파내고, 아무도 다니는 않은 경인운하를 파내시어 역사책에서나 들어봄직한 정서진을 발견해 내시니, 가카 보시기에 참 좋았다.
지끔까지 어떠한 이슈와 사건에도 등을 돌린적이 없던, 3대 보수정권이 왜 갑자기 "돌격명령"을 받은 것인냥, 정권의 핵심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는지 참 궁금하다. 왜일까?
마치 "오더"가 떨어진 것인냥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덤비니,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던" 그분이 고개를 숙여 사과까지 할 일이었으면, 대체 어떤 일이 생긴 것이길래 왜 갑자기?
없던 특종이 갑자기 조선과 중앙에 터져서, 갑자기 이슈화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저러한 방대한 자료와 조사과정에 대한 모든 것들이 어느 한순간에 도화선이 되어, 한번도 고개숙이지 않았던 공주가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어야 했는지, 먹고살기 힘들어진 서민들에게 동정여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정말 외나무줄타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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